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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칼럼(59)/일본 해운·조선·물류산업 깊이보기④

기사승인 [1967호] 2020.01.08  19:2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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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선장)

   
▲ 김인현 교수

해운업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국민들에게 충만하게 하자

일본에 도착한 다음날 동경대학교 근처에 있는 아침식사를 위한 식당을 찾았다. 스끼야라는 체인이다. 낫또 정식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는데, 벽에 걸린 그림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나는 그 그림 때문에 이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한다. 2020년 첫날도 이 스끼야에서 식사를 했다. 또 같은 생각을 했다. 일본이 이래서 해운 1위 국가가 되었고 그렇게 안정적으로 해운업과 무역업을 이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다.

그림은 1880년경으로 보인다. 범선에 물건을 실은 선박이 항구에 있고, 항구에는 사무라이 복장을 한 사람, 서양인들, 양산을 쓴 여성 등이 보인다. 일본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외국의 문물이 들어오던 당시의 그림이다. 그림이라기 보다는 그림을 크게 복사한 천을 벽에 붙여 둔 것이다. 왜 이런 시대상을 담은 그림이 동경대 근처 허름한 식당에 걸려 있는가? 예로부터 일본인들은 해운업과 무역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여기고, 이를 중시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1854년 페리제독의 흑선이 나타나 무역을 요구하자, 너무나 놀랐다. 신문물에 놀랐다. 그렇지만, 규슈의 항구에서는 네덜란드 학문이 난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지 이미 200년 이상이 되었기 때문에 쉽게 외국 신문물에 대한 개방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명치유신이라고 한다. 일본은 서양을 배우는 것을 큰 목표로 삼았다. 서양 문물을 습득하고자 수만명의 인재를 외국으로 보냈다. 그 흔적은 동경대학교의 단과대학 곳곳에 남아있다. 농대 앞에 가면 동상이 하나있다. 1880년대 독일에서 의학을 배워 와서 1890년경 동경대에 의학 강좌를 개설했다는 내용이다. 다른 단과대학도 유사하다.

해운업도 마찬가지이다. 그 유명한 사까모도 료마가 고베에서 1860년경 해운업을 시작했다. 미일수호조약의 이행을 위하여 일본대표단을 싣고 1857년 가쯔가이슈라는 막부소속의 선장이 태평양 횡단에 성공했다. 1874년 오늘의 NYK의 전신인 미쯔비씨 해운이 창립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쇄국정책을 굳게 펼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본의 일반 역사서나 소설이나 드라마에 중요한 소재로 사용된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상식선의 이야기이고 자랑거리이다.

서양문물을 익힌 일본은 급속도로 서양과의 격차를 따라 잡으면서 해군력에서도 미국, 영국과 일합을 겨룰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강압으로 주위 국가를 병탄하고, 여러 번의 전쟁을 외국에서 벌렸다. 이런 일들을 벌이기 위해서는 해군력과 해운이 필수적이었다. 1945년 종전 후의 일본의 발전은 수출로 이루어졌다. 수출품은 선박으로 인한 이동이 필요했다.

이런 일본의 150년에 걸친 역사와 경제발전의 과정을 놓고 보면 해운이란 일본 국민들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해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일본 국민들 모두에게 충만해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일본은 해운이 세계 1위이고, 해운을 중심으로 선박건조와 선박금융업도 탄탄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의 날이 법정 공휴일이라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우리는 어떠한가? 장보고 선배 선장님, 이순신 장군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인 영웅이 없다. 특히 18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 해운이 국민들에게, 국가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들어내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정말 없는 것일까? 오늘의 부강한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까지 그 기여도를 파악하고 홍보하고 국민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반성하게 된다. 국민들로부터 해운의 중요성과 발전 필요성을 인정받는 것은 우리 해운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필자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비단 일본의 사례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 여름 가족여행을 스페인으로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콜럼버스가 하늘 같이 높은 곳에 위치한 탑을 보았다. 이 탑은 바르셀로나 항구 입구에 서있었다. 압권은 세비아 성당이었다. 세비아는 1500년대에 스페인의 무역을 독점하던 곳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다음 상선들은 모두 세비아에서 출항하고 도착하도록 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부는 모두 세비아에 집적되었다. 그 만큼 세비아는 대항해시대와 뒤이어지는 유럽의 번영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상징성이 크다.

세비아 성당에 콜럼버스의 무덤을 만들어두었다. 콜럼버스의 무덤은 원래 남미에 있었는데, 그 무덤에서 뼈를 가져와서 가마로 된 무덤에 넣고 네명의 왕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가마를 짊어지고 있었다. 여행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세비아 성당은 세계적인 성당인데, 성인이 아니고는 무덤을 성당 안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극히 예외적으로 평민인 콜럼버스의 무덤을 여기에 두었다고 한다. 그 둘째 아들의 무덤까지 여기에 두었다.

나는 생각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콜럼버스를 그 만큼 존경하고 그가 국민적인 숭앙을 받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세비아 성당은 세계 2대 성당이라서 관광객이 줄을 서는 곳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그 이후 목숨을 건 대항해시대가 개막되어 신대륙이 하나씩 추가로 발견되고 그 신대륙이 유럽의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으로 역할을 단단히 해주었기 때문에 유럽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은 대항해시대의 창시자인 콜럼버스를 그렇게 존경하는 것이 아닌가? 대항해시대는 목숨을 건 희생이 따랐다는 점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장보고 선장 이후의 옛적 해운을 오늘날의 해운업과 연결시켜줄 무엇이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일본이나 유럽 사람들이 존경하고 숭앙할 만한 해운의 선각자들이 없는 가?

안타깝게도 1800년대 중반 서세동점의 시기에도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해왔다. 외국에의 개방도 일본 등 강대국의 강압에 의한 것이 되었다. 1910년 이후의 일제강점기에도 우리는 타율에 의한 소극적인 해운을 해왔다.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해양대학이 설립되고 해운공사가 만들어지면서 규모와 체계를 갖춘 해운업을 시작했다. 그나마 자본이 없다보니 힘든 나날을 보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부터 무역입국과 해운입국을 기치로 걸면서 제대로 된 해운이 일어섰다. 19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그룹의 주력사로서 크게 발전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2010년대 해운산업의 큰 불황과 실패는 국민들에게 해운은 무언가 불안하고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시중은행으로부터 선박금융이 일어나지 않고 있고, 해운에 투자했던 대기업 그룹사는 거의 떠나간 점이 오늘의 해운업의 현실이다.

두 번의 큰 구조적인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1960년대 이후에 해운이 우리 무역입국에 큰 역할을 했다고 국민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정말 우리는 해운이 우리 국민들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했는가?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찾아보아야한다.

조선시대 조운이라는 것은 있었다. 세금으로 국가에 내는 쌀을 육로가 아니라 바다로 이용해 서울 한양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조운이라고 했다. 이런 조운은 지금 말로하면 연안 항해를 이용한 내항해운이었다. 이렇게 모인 쌀은 관리들의 녹봉에, 흉년이 든 곳에 구휼의 목적으로, 전쟁에 대비한 비축미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육로를 통한 수송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규모의 쌀을 쉽게 소달구지로 이동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한번에 많은 쌀을 이동하기에는 선박을 이용하는 조운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최근 필자는 필자의 고향인 경북 영덕군 축산항과 포항의 흥해에서 이러한 형태의 조운이 있었음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순조 14년(1814년) 축산포에서 1만 3천석의 쌀을 실은 선박들이 풍랑으로 축산항에 침몰했다는 기록을 보았다. 강원도와 함경도에 흉년이 나서 북쪽으로 쌀을 올려 보내려고 했다. 축산항(당시 영해부 소속) 이북으로는 교통편이 좋지 않고 한꺼번에 1만 3천석을 이동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영해평야에서 거둔 쌀을 축산포를 통해서 강원도나 함경도로 보내는 조운이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흥해에서 축산포로 조운선을 보내는 시험을 했다는 기록도 중종 7년(1512년)의 일인데 중종실록에 나온다. 동해안에서는 흥해와 영해가 가장 넓은 들판을 가지고 있다. 서해에만 조운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런 형태의 조운이 있었다는 자료가 된다. 더 연구할 내용이다.

우리 선배 항해사들이 신대륙의 발견에 나서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선박을 이동수단으로 하여 일본과 중국을 오갔다. 그리고 조선시대에서 조운이 남아있었다. 이런 조운이 있었기에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이 굶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내용을 체계적으로 하나씩 정리해서 해운이 역사적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기여한 바가 있다는 점을 알리도록 하자. 이런 작업들을 통해서 국민들이 해운을 중요하게 여기고 고마운 존재로 알게 될 때에 우리 해운은 국민들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서양이나 일본사람들이 해운 선각자를 존경하고 숭배하는 이유는 목숨을 걸고 사지인 바다로 나갔기 때문이다. 18세기만 해도 10척의 선박이 바다로 나가면 7척만 돌아왔다고 한다. 바다로 나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항해 시대에 수많은 선원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의 풍요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항해선각자를 존경하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에는 수많은 항해선각자들이 존재했고, 오늘날까지 국민들은 그들의 봉사와 희생정신을 기리며 존경을 표하고 있다.

해방을 전후한 해운선각자들은 자기 희생과 프론티어 정신에 투철했다. 많은 선원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S 교수는 해양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선원 송출 길을 열기 위하여 일본 산코 라인에 부장으로 나가 송출길을 활짝 열었다. 이와 같이 해방을 전후한 불모지 해운을 위하여 선각자들은 희생과 봉사를 큰 덕목으로 여기고 한국해운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

그런데 2000년부터 2007년 중반까지 유례없는 해운업 초호황기가 우리를 방문했다. 모두 기쁘고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다 2008년부터 시작된 해운 불황기에 분위기는 급전직하, STX팬오션 등 우량회사들을 포함하여 10여개의 해운회사들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대부분 살아났지만 국내외 채권자들의 큰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한진해운은 사라져버렸다. 전체 해운 매출의 1/5이 줄어들었다. 물류대란이 일어나 전 세계적인 물류의 흐름에 악영향을 주었다. 과연 이런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모습들이 우리 일반 국민들의 해운에 대한 인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법정관리에서 살아난 모든 회사들이 피해를 입은 국내외 채권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신뢰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을까?

한진해운 사태이후 정기선 해운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다수의 국민들은 해운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들로 인해 그 주장에 동조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튼튼하게 회사를 잘 운영해 온 해운회사도 우량회사도 있다. 이들에게는 한국해운의 버팀목이 되어 준 것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그렇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 정부가 만들어준 톤세제도 등 다양한 해운보호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초호황기에 자본을 축적하고 체력을 탄탄히 할 기회를 우리 해운인들이 잃어 버린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점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본은 그렇게 초호황을 즐기지도 않았고 또 우리와 같이 대거 법정관리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안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거의 실패를 복기하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반성의 바탕위에서 대항해시대의 선배 해운인들이 했던 것과 같은 희생과 개척정신으로 다시 출발해야한다. 또한 1800년대부터 우리나라에도 해운이 국가와 국민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찾아 발굴하고 홍보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한다. 이런 두가지 사항들이 갖추어질 때 우리는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산업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해운이 국제적인 변수에 의하여 어려움에 처하면 도움도 받을 수 있고, 국민들이 해운회사 주식에 투자도 할 것이고, 선박투자회사도 잘 운영될 것이고, 화주들도 기꺼이 우리 선박에 화물을 많이 실어줄 것이다.

이런 점이 잘 갖추어진 것이 일본 해운업의 강점이라고 본다. 일본은 선배들로부터 150년 되는 안정적인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런 정도의 유산없는 우리 해운이 살아남기 위하여는 우리끼리 더 뭉치고 서로 도와주면서 차곡차곡 경쟁력을 갖추어나가는 길 밖에 없다. 우리의 약점이 무언지를 안다는 것도 대단한 성과일 수 있다. 해운업에서 우리가 일본에 비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충만한 2020년대가 되길 기대한다. 2020는 젊은 20대 청년이 쌍으로 모여 있는 해이다. 해운, 화주, 선박금융, 조선산업이 모두 상생하는 한해가 되고, 업계와 학계 및 관계도 하나가 되어 총력전으로 해운살리기 운동에 진력하는 2020년이 되도록 하자.

(2020.1.7. 동경대에서 김인현 선장 교수)

한국해운신문 maritime@m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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