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 이기병 박사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2020년이 되면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게 있다. ‘인코텀즈(Incoterms)’ 개정이다. 인코텀즈란 ‘정형거래조건(trade term)’ 또는 ‘무역거래 조건’이라 불리며 ‘International Commercial Terms’의 약어다. 공식 부제는 ’국내·국제거래 조건의 사용에 관한 규칙(rules for the use of domestic and international trade terms)'으로 무역 거래 시 보편적으로 이용되는 거래 조건의 국제적 통일 규칙이다.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전 세계 국제물품 매매에서 필수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국가별 판매 및 배송 계약에서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제거되어 오해와 분쟁을 줄여 거래비용 증가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국제상업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ICC)에서 1936년 제정하였기 때문에 인코텀즈 개정이 이뤄지면 제일 바쁜 기관 중 하나가 대한상공회의소다. 인코텀즈는 총 11개의 정형거래조건으로 구성되었고 물품의 위험과 비용이 언제 어디서 매도인·매수인에게 이전되는지 수출입통관 업무와 물품 운송을 누가 책임지는 등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1980년 이후 10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정 중이며 2020년이 8번째다.

인코텀즈 2020 개정 중 특징적인 것은 첫째, DAT(Delivery at Terminal)가 DPU(Delivery at Place Unloaded)로 변경됐다. 인도장소가 터미널이라는 한정된 장소를 벗어나 어느 곳이든 목적지가 될 수 있도록 사용 가능성을 확대했다. 둘째, CIP(Carriage and Insurance paid to, 운송비·보험료 지급)와 CIF(Cost Insurance and Freight, 운임·보험료 포함)간 해상보험 위험 담보 수준을 차별화했다.

그밖에 개별 규칙 내 조항 순서 변경, FCA(free carrier, 운송인 인도 조건)상 본선 적재 표기 선화증권 규정 신설, 매도·매수인이 제3자 개입 없이 직접 운송 허용, 보안 관련 의무 명시 등이 있다. 전반적으로는 크게 바뀐 것은 없다.

인코텀즈는 해운 산업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무역은 아주 옛날부터 바다를 통해서 개방과 발전을 이뤘고 불과 얼마 전까지 '무역분쟁(Trade dispute)'이란 표현을 썼으나 오늘날은 '무역전쟁(Trade War)'이라 한다. 격한 표현이지만 미·중, 한·일간의 무역 갈등을 보면 많이 어색하지도 않고 실제로도 총성 없는 전쟁터다.

지금도 해양중심의 무역거래는 절대적이고 인코텀즈를 이해하는 것은 ‘사이버다(Cyber)’. 본디 사이버란 선박의 키(rudder)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kyberman에서 유래된 ‘방향을 잡다’란 뜻으로 인코텀즈는 무역업무의 기본적인 방향성을 나타낸 규칙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컨테이너 혁명과 복합 운송의 일반화, 선박 공법의 발전으로 지구촌은 새로운 정형거래 조건이 필요했고 그 중심은 해상운송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며 정형거래조건 중 가장 오래된 것이 FOB(free on board, 본선인도 조건)다. "본선의 난간(ship's rail)"이란 개념을 통해 매도인, 매수인의 위험 및 비용의 이전 시점을 나타낸다. 배의 본선의 난간은 국가 간 국경의 역할도 했고 선박은 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는 외국의 영토로 인정받는다.

비근한 예로 ‘아덴만 여명 작전’시 소말리아 해적들이 체포되어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된 이유도 우리나라 선박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생활을 하는 감옥, 군대, 수도원은 전염병 확산에 영향을 주는 매개체였고 선박은 ‘바이러스 양성실’로 지대한 공헌(?)을 했다.

571년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해 2백 년 동안 창궐한 ‘1차 대 역병’ 때 이집트 곡물 수송선이 흑사병(패스트,Pest)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을 날랐다. 또한 ‘2차 대 역병’으로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죽게 한 흑사병은 여러 경로로 번졌는데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바닷길을 통한 전파였다. 흑해에서 1347년 출발한 배 안에 흑사병으로 사망한 시신들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배 안의 쥐들이 육지로 퍼뜨렸다. 사람들은 이를 알고 외국 배를 항구에서 분리시켜 40일의 격리 기간을 두고 살아남은 자만 하선시켰다. 그래서 검역이란 뜻인 ‘quarantine'이 이탈리아어로 40일이라는 ’quarantenaria'에서 유래됐다.

오늘날 전 세계 어디든 배가 항구에 입항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됐고 검역 필증도 받아야 한다. 계속해서 전염병이 육지에서 창궐하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위험한 장거리 항해 길에 나섰고 역설적으로 해외 진출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해 유럽 국가들의 식민주의 팽창을 이끌어냈다.

아메리카 대륙에 없었던 ‘천연두’라는 전염병도 대항해 시대 식민지 개척자들이 배를 타고 끌고 와 엄청난 인명 손실을 끼쳤다. 선박은 ‘전염병 세계화’의 일등공신이었고 ‘생물학적 판도라의 상자’였다.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하고 대패했던 결정적 원인이 발진티푸스(Typhus fever)란 전염병의 발진이었다. 이 병은 아일랜드 대기근과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수용소 포로들을 대부분 사망케 했고 배같이 좁은 공간에서 발생한다고 일명 ‘선박 열병(Ship fever)’이라 했다.

20세기 최초의 팬데믹(Pandemic) 질병인 스페인 독감도 알고 보면 최초 발생지는 미국이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들이 수송선 25척을 타고 유럽에 가면서 배 안에서 퍼졌고 오리로 추정되는 조류가 인간의 몸에 바이러스를 옮기면서 시작된 이 질병은 약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인간이 짊어진 세 가지 원죄가 있다고 한다.‘전쟁’과‘빈곤‘질병’이다. 전쟁의 비극과 대규모 굶주림은 전염병을 증폭시켰고 사람과 물자가 많아지면서 해양을 거점으로 질병을 확산시켰다. 지나간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적 경험이 그러했다. 인간이 전염병을 이겨보려고 많이 쓴 대책은 기도와 제사였고 가장 요긴했던 방법은 격리와 배제였다.

인간이 겪는 주된 질병은 상당 부분 어떤 시기에 동물로부터 기원한 것이었다. 야생 동물들을 목적성을 갖고 가축화하면서 서로 병원체를 주거니 받거니 시작된 인류사가 오늘날‘개와 늑대의 시간’을 겪고 있다.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낯선 시간이다. 단순한 감기인 줄 알았는데 아무도 원치 않았던 코로나-19 놈이 시치미 떼고 찾아와 극한적 불확실성(Extreme Uncertainty) 시대의 판을 키우고 있다. 악귀 같은 놈이다.

코로나로 인한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기업들이 세웠던 경영전략에 핏줄이 터지고 있다. 특히나 국가 기간산업으로 글로벌 가치사슬의 ‘동맥 순환’을 책임지는 해운물류업계에 대한 유동성 지원이 시급히 필요하다.

물류의 관건은 리드타임(Lead Time) 관리를 통한 ‘적기 운송’이 중요한데 그 체계가 패닉에 빠졌고 후방 산업 특성상 물동량 감소로 밥그릇이 줄어들어 울고 싶은데 빰 맞는 격이다.

긴급경영 운영자금 대출 및 원리금 상환 유예, 항만시설 비용과 조세 감면, 4대 보험 유예 등 유동성 심폐소생술이 필요하다. 성장은 둘째치고 일단 살릴만한 기업들 굶어 죽기 전에 살려놓고 보자. 굳이 갖다 붙이자면 "뭇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라.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면 최고의 공덕이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그 분 말씀이다. 전염병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찾아온 불확실한 공포로 경영 환경이 메말랐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기업들을 아끼고 사랑할 시기다.

또한 그동안의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진화적 방법의 기업 지원 전략이 필요하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무서움과는 다른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위협에 우리는 근원적인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 긴장감을 갖고 개인위생은 철저히 하되 공포와 두려움에 쫄지 말자. 그리고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언젠가 또 하나의 세월이 가고 2030년이 되면 인코텀즈는 어떻게 개정되어 있을까? WTO와 FTA 가속화, 관세 없는 무역 거래 실현과 전자무역 확대 등을 반영했던 그동안의 시대상 외 미증유의 전염병 여파로 비대면, 블록체인, AI, 디지털, 자동화, 전자상거래 등에 획기적인 변혁이 있지 않을까?

집 근처에 호수가 있어 아내와 가끔 산책을 하면서 콧바람을 적신다. 본디 운동에 남다름이 없어 비계가 많지만 먹고 살고 연구하는 일에 궁리(窮理)가 필요하거나 삶의 문제를 회피하고 싶을 때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자 종종 둘러본다. 호수 속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에서 사촌동생을 봤다. 한때는 스위스 유학까지 다녀왔고 백화점에서 옷 장사를 하는데 지금은 공사판을 나가고 있다. 1명 남은 직원 월급을 주기 위해 가게를 맡겨 놓고 스스로의 인생에 수고스러움을 아끼지 않기에 조만간 불러서 따뜻한 밥 한 끼와 괜찮은 안주로 소주잔이라도 기울여야겠다.

코로나로 인한 고난과 역경 속에 무한 버티기로 마음의 근육이 모두 단단해 지고 혼자 걷다가 어두운 밤이 와도 울며 걷지 말고 눈물에 시들지 말자. 좋아하는 시 한 편을 토탁토탁 아슬아슬한 우리 시대에 바치고 싶다.

<나는 돌덩이>

나는 돌덩이
뜨겁게 지져봐라
나는 움직이지 않는 돌덩이
​거세게 때려봐라
나는 단단한 돌덩이​
깊은 어둠에 가둬봐라
나는 홀로 빛나는 돌덩이부서지고 재가 되고 썩어 버리는
섭리마저 거부하리
살아남은 나
나는 다이아
지은이: 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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