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숨결이 살아있는 석도시

위해에서 석도로-적산명신을 영접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박3일간 중국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지막 날일정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적산법화원 관광이었다.

전날 저녁 짐을 싸놓고 자둔 터라 아침 일찍 일어나 별도의 준비 없이 조식을 먹은 후 씻고 싸뒀던 짐을 모두 챙겨서 호텔을 나섰다. 적산이 위치한 석도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으니 이제 위해는 끝이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비록 체류일은 단 이틀로 짧았지만 한락방 등이 위치해 처음 방문한 한국인들도 낯설지 않게 품어줄 수 있는 위해의 매력에 필자도 어느덧 푹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중국에 도착했던 것처럼 40여분을 버스로 내쳐 달리니 저 멀리서도 한눈에 뚜렷이 보이는 ‘적산명신(赤山明神)’이 목적지에 점차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산명신과 법화원이 위치한 적산은 석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석산으로 붉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있어 ‘적산’이라고 불린다. 그 중에서도 적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적산명신상은 높이 58.8m로 중국 최대의 해신상일 뿐 아니라 아시아의 신불동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 저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적산명신(赤山明神)’의 위용.

대명신은 바다를 관장할 뿐만 아니라 행복과 제물을 가져다주는 산동지방의 수호신으로도 숭상 받고 있는데, 중국 정부는 석도적산풍경구를 개발하면서 대명신상을 적산에 설치했다. 일각에서는 이 적산명신이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를 신격화한 것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교토시 북쪽의 히에이산(比睿山)에 세운 적산선원에서 장보고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일본 전국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은 장보고를 가문의 수호신인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었다는 사실이다, 둘 사이에 상호 연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중일 양국에서 적산과 대명신이라는 명칭이 겹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국의 위인인 장보고가 자리 잡고 있음은 매우 흥미롭다.이 적산명신은 바다를 관장하는 대명신으로 이 동상을 자세히 보면 오른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누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적산포의 파도를 잠재운다는 의미로 예부터 적산명신은 석도 앞바다의 어선들을 보호하는 대명신이었다. 이에 걸맞게 적산명신상은 석도 앞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적산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적산명신상이 위치해 있는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석도 앞바다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때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와 적산법화원, 장보고 전기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부터 ‘위해에서 닭이 울면 인천에서 들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해와 석도는 한국과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까운 중국의 도시이다. 적산명신이 과연 장보고를 신격화하고 형상화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바다를 관장하는 이 대명신이 중국 바다 뿐 아니라 그 시절 이 지역에 거주하던 통일신라인, 더 나아가 지금의 우리나라 바다까지 보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비한 ‘초(?)’

▲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적산명신상은 훨씬 더 큰 위압감을 자랑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이날은 화요일로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이 많이 없고 한산한 느낌이었다. 멀지는 않았지만 적산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서부터 정상까지는 유료 셔틀버스가 운행하고 있어 무더운 날씨에도 손쉽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쉽게도 매일 11시에 거행된다는 분수공연은 최근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볼 수가 없었다.

우선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적산명신상을 보러 올라갔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형체를 자랑하던 적산명신상은 막상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니 훨씬 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우리가 적산을 올랐던 때가 날이 흐린 탓인지 아니면 안개 때문인지 시야가 좋지 않아 석도 앞바다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음에 맑은 날에 한번쯤 더 찾아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산명신상 아래에는 불당이 하나 있는데 내부에는 커다란 불화를 비롯해 어림잡아 수십 가지의 불상들이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불당 내부를 기웃 거리자 스님 한분이 나와서 필자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친절하게도 절을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천주교 신자이지만 이런 곳에 왔을 때는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스님이 일러준 대로 삼배를 마치니 스님이 이내 본색을 드러냈다. 불당에서 판매하는 초를 사서 공양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테니 초를 사라는 것. 초의 가격은 다양했는데 초가 크고 비쌀수록 소위 ‘기도빨’이 잘 먹힌다는 친절한 설명도 곁들였다. 스님의 상술에 넘어갈세라 거듭 죄송하다고 손사래를 친뒤 황급히 불당을 빠져나왔다.

해상왕 장보고의 일생이 한눈에

적산명신상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장보고전기관과 법화원이었다. 이 지역은 중국 정부가 한국 관광객을 겨냥해 약 300억원을 들여 개발한 것으로 장보고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적산법화원은 9세기에 파손되어 거의 폐허나 다름없던 곳을 1998년 중건한 것이며, 장보고전기관 역시 2007년 4월 중국 적산그룹 유한회사가 5개의 전시실로 꾸민 곳이다. 전날 들렀던 유공도가 5A급 경승지였다면 이곳 적산 관광지는 4A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 장보고기념사업회에서 설치한 ‘법화우의보정(法華友誼寶鼎)’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전기관 답게 깔끔하고 장보고의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우선 전기관 입구에 들어서기 전 해상왕 장보고의 활약상을 새긴 부조와 그 앞에 놓여진 청동솥이 눈에 띄었는데 ‘법화우의보정(法華友誼寶鼎)’이라고 이름 붙은 이 청동솥과 부조는 장보고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철)에서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전기관으로 들어서니 청동으로 만든 장보고 장군의 동상이 우리를 압도했다. 장보고 동상의 높이 8m로 적산명신상과 크기 면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적산명신상 이상의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해상왕 장보고가 어떠한 생애를 살다 간 인물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장보고전기관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장보고 장군 동상.

전기관은 총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장보고의 어린 시절부터 당나라로 건너와 무령군에 입대해 이사도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적산포를 무역의 거점으로 삼아 한·중·일 삼국 해상 무역을 폭넓게 전개하는 한편, 법화원을 건립하고, 신라로 돌아가 청해진을 건설하고 해상왕으로 활약하다가 그가 가장 신뢰하던 부하인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기까지 장보고 장군의 일대기를 그림과 인형, 유물 등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전기관 한켠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해신’과 관련된 사진과 영상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드라마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전기관을 다 둘러보고 나서 그런지 탤런트 최수종 씨가 앞서 봤던 장보고 장군 동상과 오버랩되면서 장보고로 분하기에는 다소 이미지가 약한 게 아닌가 하는 혼자만의 생각도 가져보았다.

▲ 장보고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인기 드라마 '해신'의 영향력은 머나먼 중국에까지 미친듯 하다.

법화원의 고즈넉함은 발길을 잡고

장보고전기관에 이어 발길을 돌린 곳은 교과서에서나 보던 적산법화원이었다. 장보고가 당나라 무령군의 소장으로 있을 때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찰은 신라원 중에 가장 유명했으며 1년 수확량이 500섬이나 되는 토지를 기본 재선으로 건립된 것이었기 때문에 장보고는 이를 통해 향후 무역활동을 통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적산법화원은 당나라에 거주하는 신라인의 신앙 거점인 동시에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예배처, 신라와의 연락기관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 법화원 입구.

법화원은 생각보다 아담한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었다. 타국이기는 하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무역활동의 기반일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의 신앙거점이었던만큼 훨씬 큰 규모를 예상했던 필자로서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법화원의 고즈넉함은 이내 그러한 생각조차 사라지게 만들었다. 법화원 입구를 지나 보이는 불탑 뒤로 위치해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법당에 다다랐을 때에 느껴지는 바람과 고요함이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히려 규모가 지금보다 더 컸었다면 여타 다른 절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텐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법화원은 당나라 무종때 불교탄압으로 인해 손실되었으며 현재 모습은 1998년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최근에 중건했기 때문에 깔끔하고 정돈된 듯한 모습은 보기 좋았으나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 점은 안타깝게 다가왔다.

▲ 법화원 내부 모습.

다시 한국으로-군산펄호에 몸을 싣다

법화원을 끝으로 중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처음 중국에 도착했을 때 이용했던 석도항국제터미널로 돌아왔다. 우리를 중국에 데려다 준 군산펄호가 저 멀리 보이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물론 중국에서의 일정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막상 군산펄호를 타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필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산으로 향하는 군산펄호에 몸을 싣고 객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 문득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산동성 여행은 크게 볼게 없다던 선배 기자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 2박3일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곰곰이 복기해보니 선배 기자의 말이 일견 맞는 면도 있지만 또 일견은 틀리다고 생각했다.

이번 중국 위해, 석도를 관광 일정은 필자에게는 나름 알찬 시간이었다. 변화된 중국을 목도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으며, 석도와 위해는 처음 중국을 접하는 한국 관광객들도 큰 위화감 없이 녹아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중간 카페리 산업이 여행산업과 별개로는 발전할 수 없고 여행산업이 카페리산업의 핵심구성요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전이야 어땠을런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산동성은 여행코스로서도 크게 손색없는 구성과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을 어떻게 더 세련되고 편리하게 꾸미고 가꾸는지, 그리고 새로운 관광거리를 개발하여 보다 풍성하게 만들 지는 전 세계 어느 관광지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산동성 지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보다 열린 마음으로 산동성을 향하는 카페리에 몸을 실어보는 건 어떨까? 여유 있는 일정과 마음가짐만 있다면 분명 산동성 카페리 여행은 꽤나 만족스러울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 군산펄호 갑판에서 바라본 석도항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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