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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고록/정도경영의 師表 박종규 회장(41)

기사승인 [1941호] 2019.07.11  15: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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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뒷돈 요구로 무산될 뻔 했던 회담

   
▲ 박종규 회장

하지만 결정적인 걸림돌은 남북 양측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문제였다. 사실 북한측 대표들은 모두 정부의 관료들이었지만, 민간인 명함을 들고 민간인 신분으로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이 회담의 경우는 조선항만무역회사라는 이름으로 합의서에 서명을 하도록 돼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북한간의 계약은 법적으로는 순수 민간기업간의 계약인 셈이다.

따라서 민간업체간의 계약 합의문에 아무리 ‘대한민국 선박’이라는 문구를 넣어도 정부의 승인이 없다면 계약이행을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양측이 서로 정부당국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당국의 승인은 물론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보다도 북한 당국의 승인이 꼭 필요했다.

만약에 북한 당국이 합의문에 대해 승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민간 합의문에 ‘대한민국 선박을 투입한다’는 문구를 넣어도 북한이 남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무국적 선박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북한항에 입출항하는 것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나진선봉의 자유무역지대를 이용하는데 따른 혜택도 받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한의 자유경제무역지대법 제7조에는 “공화국 영역 밖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 동포들도 자유경제지대 안에서 경제무역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명시 돼 있는데,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공화국 영역이 제주도를 포함한 남한까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북한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정부가 승인한다는 조건을 계약서에 넣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측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들로서는 정부 승인 조건을 붙이게 되면 간접적으로나마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눈치였다. 정부 승인 조건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이 되다가 결국은 회담이 결렬되고 말았다. 나는 ‘대한민국 선박’을 표기한다는데 합의한 것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북한측에 회의록이라도 작성해 남기자고 제안을 해 봤지만, 북한측은 냉정하게 이러한 제의도 거절했다. 회담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길에 올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로 연락도 없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1994년의 추운 겨울도 지나고 1995년에 접어들어 따뜻한 봄이 되자 북한측이 나진·선봉 자유무역지대에서 회담을 갖자고 제안해 왔다. 나진항을 직접 둘러보고 끝맺지 못한 남북한간 직항로 개설 문제를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우리와 중국 연변항운공사측은 북한의 이러한 제의를 수락했다. 나진·선봉 지구를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 북한측의 이 사업에 대한 진의를 파악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나와 유승근 당시 기획실장, 이덕헌 안전품질관리실장 등 3명과 연변항운공사 전용만 회장 일행은 1995년 6월 14일 중국 도문세관을 통과한 뒤 승용차편으로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남양교를 넘어갔다. 이 북한 방문이 국내 해운인으로서는 최초로 도문을 통해 북한에 들어간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회담은 다음 날 오전 9시에 북한측 관계자 8명(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나진항기사장, 해양무역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하지만 회담은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부닥쳤다. 북한측이 남북한 양측간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사업추진담보금으로 20만달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북한측은 연변현통집단의 전용만 회장에게 쪽지를 보내 이런 내용을 요구했고, 나는 어깨너머로 이 쪽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뤄낸 남북직항로 개설

북한측이 뒷돈을 요구한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회담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나올 줄은 정말 예상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국내에서도 뒷거래 관행을 배격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측의 요구는 물론 들어줄 수는 더더구나 없었다. 나는 북한측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화살을 전용만 회장에게 돌렸다.

“전회장이 얼마나 신용이 없으면 보증금을 내놓으라고 하겠소. 전회장이 아마도 북한에서 신용이 없는 짓을 많이 한 모양이구먼…” 나는 이런 말을 내뱉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숙소로 돌아와 버렸다. 회담을 중단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한측은 그 후 30분만에 “우리가 착각을 했다. 오해를 푸시라”며 정중히 사과를 하면서 회담을 속개할 것을 요청해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회담은 다시 시작 됐다.

하지만 회담은 초반부터 또 난맥상을 보였다. 북한측이 앞서 북경에서 합의했던 ‘대한민국 선박’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번복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측은 ‘대한민국 선박’이라는 표현 대신에 ‘KSS해운이 운영하는 선박’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북한측의 주장을 즉각 거부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KSS해운이 운영하는 선박에는 외국 선적의 선박도 포함되기 때문에 ‘대한민국 선박’이라는 의미가 퇴색되는데다가, 결국 남북한간 항로가 내항항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승인도 문제가 되겠지만, 관세도 부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측은 북한측에 마지막으로 ‘주식회사 KSS해운이 소유하는 선박’으로 하자고 역제안을 했고, 분주하게 평양측과 연락을 하던 북한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 선박이 나진항에 입항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계약서 작성 언어를 ‘한글’로 하자는 우리측 주장과 ‘조선말’로 하자는 북측 주장이 엇갈렸던 것도 ‘우리말’로 하자는 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계약서 내용이 모두 합의가 됐다.

마침내 1995년 6월 18일 나진항을 중개지로 해 부산과 길림성을 잇는 직항로 개설 계약이 체결됐다. 계약 당사자는 KSS해운과 연변현통집단이 55대 45로 출자한 동용해운과 북한의 대외무역공사였다. 이 계약에 근거해 10월 6일 부산항에서 연변현통집단 소유의 ‘연룡4호’가 처녀항해에 나서면서 남북 직항로는 첫 테이프를 끊게 됐다.

한국해운신문 maritime@mpres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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