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 이기병 박사(lgb1461@naver.com)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의 도시이자 교통·물류의 거점이며 부동·자유·군사항을 가진 러시아의 극동지역 아시아 관문이다. 또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주둔지이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종착점이고,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의 근거지이자 또 다른 이들에게는 사회주의 혁명과 식민지 민족해방을 꿈꾸던 젊은 국제도시였다.

필자는 최근 한국관세학회(회장 엄광열)와 러시아 관세아카데미, KORTA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이 주최하고 강원도 후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북방경제 협력과 한-러 통관행정 개선방안’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다.

스웨덴 해운물류 기업인 스테나(stena)가 지난 2013년 개설했던 속초-블라디보스토크간 카페리항로 운항을 위한 국제카페리선사(스테나대아라인) 설립과 선박 도입 등의 실무책임을 맡았던 필자의 직무 경험상 최근의 한-러 통상, 관세행정, 항로 활성화 등이 어떻게 변화됐는지가 자못 궁금했다.

스테나의 속초-블라디보스토크 카페리항로는 교역 부진이 계속되면서 겨우 2년여를 운항하고 중단됐다. 항로 중단 이유를 복기해보면 첫째, 내부적 요소로 종합적인 경영전략의 부재였다. 한국-연해주-중국 동북 3성으로 이어지는 황금 노선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착각 속에 조직 논리가 함몰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출발점, 풍부한 자연자원, 한국과의 지리적 접근성, 잠재력은 있었지만 시장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부족했다. 적극적인 투자도 좋지만 냉철한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위험을 최소화 하고 기피했어야 했다.

또한 한-러시아 양국 교역 구조에 맞는 화주 발굴도 부족했다. 한국은 소비재, 러시아는 원자재 수출 구조이기 때문에 이에 맞는 맞춤형 화주의 홍보·유치를 제대로 못했고 이는 여행객 모객 활동에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현지 하역·포워딩 업체 등과의 상호 이해도 부족했다. 세관의 관습, 처음과 다른 항만·대리점 요율표(Tariff), 예상치 못한 추가 비용의 발생 등 국제 사업의 협력 증진에 있어 현지 사정을 고려한 접근방식 및 해결방법에 대한 차이점에 잘 대응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충분한 신뢰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둘째, 외부적 요소로서 통관 및 행정장벽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통관화물에 대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검색을 생략하지만 러시아는 전수검사가 원칙이다. 한국 기업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먼저 체감했던 것은 빈번한 통관일수 지연, 과다한 통관 제출 서류 요구, 보세운송 비활성화, 수출자 제품 가격이 아닌 러시아 세관의 자체적인 상품가격 기준가 적용 및 자율적 해석 등이었다. 결국 세관 통과 기간은 길고 하역 및 통관 비용이 높아 비효율적인 물류 체계를 낳아 많은 한국 기업들의 어려움을 겪었다.

셋째, 인프라 부족이다. 러시아는 군사와 상업항만으로 분류되는데 연방정부의 허가를 받은 경우 개인 및 회사가 건설과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 자루비노(Zarubino)항 같은 경우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부두 하역 인프라 부족으로 20피트 경량 화물 위주로 취급하고 수동 이동식 크레인 사용으로 효율성과 안전성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러시아 주요 항만들의 공통점이다. 또한 러시아항은 입·출항료, 예선료, 도선료 등 기본적으로 항만사용료가 높으며 이는 속초항도 같은 상황이었다. 지역 내 변변한 선박수리·예선·선용품 업체가 없는 것도 추가 비용 증가로 이어졌다.

강원도가 한-러 북방경제의 선봉장이 되기 위해서는 환경변화에 대응해 스스로의 산업 전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지역이 주도해 혁신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주도로 산업공유자산(industrial commons)이 강원도, 해운선사, 물류 기업, 화주, 대학, 연구소, 전문가 등이 연계해 형성돼야 하는데 이것이 부족했다. 즉 실제로 북방경제 산업현장에서 뛸만한 선수가 없었다. 뒤늦게 강원도에서 북방경제의 물류기지 중심역할을 위해 (재)북방물류연구지원센터를 설립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북방항로가 활성화되기 위한 방향성으로 첫째, 원스톱(one-stop) 물류 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한다. 과다한 국경통관 시간이 감소하고 물류처리능력이 증대돼야 한다. 양국 세관 당국은 물론 CIQ기관간 정례화된 협업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비롯한 주요 항만들의 전자신고제도의 제도적 보완과 통관 업무의 글로벌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 철저한 수요자 중심 정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당면한 현안·문제 해결과 실사구시(實事求是) 방안을 통한 역내 물류 증대를 도모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성공사례가 많이 나와야 한다. 국제물류의 운송방식이 Port to Port에서 Door to Door로 변경됐으므로 복합운송(Multimodel Transport)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양국 항만 간 컨테이너 하역 장비 투자 및 열악한 터미널 개선 등 기본적인 물동량 창출을 위한 인프라 확충이 시급하다. 하드웨어 없이 피견인 트레일러(Towed Trailer), 기차, Sea&Air 등 복합연계 운송기능 네트워크 강화는 어렵다. 안정적인 물류 자립적 경제구조 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이 급하다는 얘기다. 이를 위한 다양한 전제조건 및 현실화 구조를 조성하려는 많은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번 일정에는 고려인 문화센터,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이상설 선생 유허비, 최재형 선생 고택 방문 등 다양한 우리 역사 탐방도 포함돼 있었다. 일제의 탄압과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해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지난한 투쟁과 목숨을 바친 조상들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러시아로 단순 이주했던 것이 아니라 그곳 안정적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에서 정치·경제활동이 제한되고 강제동원으로 고통 받는 삶을 벗어나 일본이 없는 주체적 의지를 갖고 살 수 있는 공동 번영의 나라를 꿈꾸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선조들이 살던 연해주 지역에는 아직도 남·북·중·러의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남아 있고 누군가는 블루오션(Blue Ocean)이라고 하는 현대판 육·해상 비단길이 펼쳐져 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해 평등하고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나라 만들기에 힘썼던 조상들의 너무도 많은 애씀을 승화해 우리는 이 지역을 새로운 북방경제 동력의 전초기지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잠재력으로 북방 경제를 발전·협력할 수 있는 민족적·산업적 네트워크 활성화를 통해 제2의 코리아 디아스포라(Diaspora)가 혁신적으로 펼쳐지기를 고대해 본다.

북방경제의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태양이 한국이 되는 그날, 거품 송송한 맥주 한잔을 놓고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3번 외친 ‘꼬레야 우라(대한독립만세)’를 한번 큰 소리로 읊조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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