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만 헤세와의 문답)

-김문호 한일상선 사장

문 :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반도국가의 서생이 문안 여쭙습니다. 그쪽 세상에서도 산과 호수, 햇살이 뜨겁게 내려쬐는 바위, 그리고 구름의 형상들을 사랑하면서 자적하시는지요?

답 : 반갑습니다. 일찍이 인도의 시성 타골이 동방의 등불이라고 노래했던 ‘고요한 아침(Morning calm)의 나라’,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조차 ‘동방의 예의지국’이라 칭송했던 귀국을 짐작합니다. 참으로 멀리서 걸음 하셨구려.

문 :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어쩌다 와전된 이름인가 합니다. 당시의 타골이 이웃의 압제에 부대끼고 있는 우리나라의 한문 국호 ‘朝鮮’을 접하면서 뒤의 고울 선(鮮)자를 고요할 선(禪)의 훈으로 혼동했던 일인가 싶습니다.

답 : 그게 그렇군요. 나의 무식이 여지없이 드러난 셈입니다. 그러나 나는 귀국이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게 장구한 단일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견지하고 있으며 귀국의 고유문자는 지구상 어느 민족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지금껏 세계 최고(最古)인 줄 알았던 우리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가 귀국의 그것에 2백 년이나 뒤진다던가요. 바로 그 금속활자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라는 불교서적이 명백한 증거라면서 말이지요.

문 :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들먹인 꼴이 되고만 서생의 무례를 꾸짖어 주십시오. 과연 동서와 고금을 자유자재하시는 선생님의 통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선생님께서 유명을 바꾸신 지 어언 쉰다섯 해가 되는 오늘까지도 동방의 서생들이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우러르는 소이인가 합니다. 거기에 동양적인 정서와 읽기 편한 문체가 친밀감마저 보태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독일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토마스 만은 선생님을 “눈물의 골짜기를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라고 했던 것일까요.

답 : 나 또한 생각 없이 해 본 소리이니 너무 괘념치는 마시오. 아무튼 오늘의 코리아가 대단한 문화적 선진국임에는 틀림이 없잖소. 그래서 타골이 예언했던 동방의 등불이 지구를 밝힐 날이 멀지는 않으리라고 나도 믿고 있소.

문 : 선생님의 ‘페터 카멘찐트’ 혹은 ‘향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제가 중학교 삼학년 때였습니다. 겨우내 눈에 묻혔다가 봄이면 빙하가 녹아내리는 젠 알프스 산록의 호수마을 소년이 학업을 위해 도시로 진출한다는 줄거리는 비슷한 나이의 동양 소년 하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나 또한 진배없는 산골 출신으로서 객지살이의 향수가 절실했거든요. 밤을 새우다시피하면서 독파했을 때의 감흥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개안의 충격이었습니다.

어느새 방랑이라는 화두가 내 안에 들어앉았고 나도 몰래 산과 강, 구름을 좇으면서, 당시에 유행했던 소위 무전여행의 고행(?)에 투신하게 되는 변환이었습니다. 여럿 이웃 나라들의 문물을 섭렵한 주인공 카멘찐트가 호숫가 고향마을로 회귀했을 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 자신의 주량이 아버지를 이긴다는 것이었고, 늙고 병든 니데거 노인의 주점을 넘겨받고 싶지만 혹시라도 아버지가 “거봐, 라틴어를 그렇게 파고도 별수는 없지?”라면서 승리감을 가질까 봐 망설인다는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참으로 선생님답다면서 내내 훈훈했습니다.

이렇듯 수려한 문체와 섬세한 터치로 한 소년의 취향과 진로를 일시에 바꿔 놓는 선생님의 ‘향수’는 형식이든 내용면에서 허구의 소설이 아니라, 한 청년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수필이 아닐 런지요.

답 : 그건 아무래도 좋소. 이야기가 보다 길고 복잡하면서 등장인물이 훨씬 더 많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일리아드가 서사의 시(詩)로 통용되지 않던가요? 그러나 나로서는 한 편의 글을 두고 소위 장르를 따지는 일에는 관심이 없소. 그건 마치 태평양과 대서양의 형상과 성분을 구분하려는 것만큼 부질없는 짓이오. 무엇을 쓰든 경계 없이 자연스러우면 되는 것 아니겠소?

문 :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자연이 대부분의 배경인 것 같습니다. 도회지의 조형물이 등장하더라도 기껏 신학교나 공원,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 정도에 지나지 않거든요.

답 : 일정 부분은 맞는 말이오. 자연만이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포용하고 쓰다듬거든요.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라도 자연을 가까이하고 습득해야 된다는 생각이오.

문 : 미국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의식주 일체를 땅과 숲, 호수에만 의존했던 헨리 소로우, 버몬트의 산속에다 돌집을 짓고 백 살까지 살고는 스무 살 연하인 아내의 손을 놓으면서 눈을 감은 스코트 니어링 같은 사람들도 선생님만큼 자연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답 : 나의 앞뒤를 살고 간 두 미국인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지 않았소. 국가의 일방적 명령에 대한 시민불복종을 주장하거나, 탐욕적 이기주의로 얼룩진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산속으로 이주한 그들은 인간을 외면했던 거요. 그들은 자연의 형상과 색깔, 소리, 향기, 맛과 감촉을 고마워하며 즐기기는 했을 거요. 그러나 그런 인간의 오감만으로는 자연을 사랑할 수는 없소. 그것은 자연의 표정과 기미를 살피고 자연의 생각과 언어를 알아들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에게 전할 수도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배가된 기쁨을 함께 누릴 인간에의 사랑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오. 자연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오. 나도 한 때는 인간을 도외시한 채, 술과 자연만으로 일생을 자적하려고 치기를 부렸던 적이 있었소.

육 년간의 고행으로도 길(道)을 터득하지 못한 석가모니가 어느 날 문득 득도한 것은 모든 고행을 접고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온 다음이었소. 맑은 강물에 목욕을 하고 사람들이 가져온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동네 처녀가 끓여다 준 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랜 다음 보리수 밑 바위 위에서 상쾌한 바람을 쐬고 앉았을 때가 아니었소?

문 : 자연이 인간이고 인간 또한 자연의 다른 이름이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선생님의 또 다른 명작 ‘싯다르타’에서도 주인공 싯다르타를 해탈로 이끈 스승은 뱃사공 바수데바였고 바수데바에게 삼라만상의 소리를 듣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강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무위자연을 최대의 덕목으로 꼽는 동양의 고전 노자(老子)에서도 가장 높은 선은 바로 물과 같은(上善若水) 것이라 했더군요.

선생님의 ‘싯다르타’를 처음 접한 것은 삼십대 중반이었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의 대면이었지만 이번에도 충격이었습니다. 서구인으로서는 가당치도 않을 주제를 동양인 누구라도 뺨치게 그려내셨더군요. 앞에서 말씀드린 뱃사공 바수데바는 물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고 상대방의 전부를 받아들이면서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하나가 되는 성애(性愛)의 극치를 가르쳐 준 기생 카라마, 타인을 속이면서 돈을 버는 장사와 도박, 방탕의 호사까지 가르쳐 준 부상(富商) 카마스바미, 제 어미 카라마와의 오랜 연애질은 알지만, 그렇다고 아비로 인정할 수는 없다면서 달아난 아들까지도 싯다르타의 스승이었다는 전개가 서구의 관념으로는 파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선생님의 ‘데미안’이 떠올랐습니다. 친구 싱클레어의 그림에다 붙인 데미안의 해석,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라는 구절 말입니다. 포악한 카인이 선한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라 힘, 재주, 담력 등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뛰어난 카인을 두려워하면서도 제압하지 못 하는 무리들이 그의 이마에다 상징적인 신의 표적을 갖다 붙인 거라고 반론하는 아프락사스, 즉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요소를 겸비하는 신 말이지요.

답 : 바로 그것이지요. 한 쪽 벽은 회칠로 발라 버리고 유일신의 규범적 선만을 일변도로 주입시키는 제도로는 인간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내가 동양과 서양의 여러 지방을 방랑한 동인이었소.

문 :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이미 외증조부로부터 동양의 유전인자를 혈통으로 타고나셨더군요.

답 : 내가 인도 등 동양에 심취했던 것은 그곳이 내 어머니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소. 유일신의 억압적 교리가 아닌 그곳 힌두의 다양한 자연관과 명상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거요. 카스트의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르게 꾸며진 네 권의 베다 경전만으로도 내 갈증은 쉽게 해소되리라 믿었지요. 그러나 결국 허망한 기대였소. 힌두의 3대 경전 모두를 뒤져 봐도 하나같이 바라문을 찬양하고 카스트의 계율을 신봉하라는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소. 그마저 너무나 다기(多技)한 나머지, 힘을 잃고 늘어진 가지들이 허망한 비약과 궤변의 지지대로 떠받쳐져 있었소.

질식 직전의 내 영혼에 숨통을 틔운 것은 바로 중국적인 지혜였소. 한문으로 ‘自然’이라는 두 글자가 바로 그거요. 자연의 본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함유하는 표의는 지구상 어느 문장이나 웅변에도 없소.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분해할 수 없는 우월적 존재. 그것이 바로 신(神)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그들의 유(儒). 불(佛), 선(仙) 세 종교 모두가 사람(人)과 함께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선도(仙道), 혹은 도교(道敎)가 바로 그것이오. 그들의 추구는 사람(人)과 자연(山)이 만나서 선(仙)의 경지로 합일하는 것이오.

문 : 동양의 서생이 서양의 선생님으로부터 동양학 강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별호를 ‘알프스의 한란’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알프스가 유럽의 심장인 반면 한란은 동북아의 세 나라, 한국, 중국,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동양란이거든요.

답 : 좋은 이름을 지어줘서 고맙소. 그러나 동쪽 끝 세 나라에서도 기후가 온화한 남쪽 해안지방에서만 자란다는 한란이 알프스의 적설과 빙하를 견딜지는 의문이오. 기왕에 물꼬가 터진 대화이니 뭐든지 스스럼 두지 말고 말해 보시오.

문 : 선생님의 소설 ‘데미안‘에서 동명의 주인공 청년을 끝내 죽이는 종결에는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 청년이야말로 아프락사스 신의 카인이 아닐 런지요. 그 또한 친구 싱클레어가 깨고 나와야 할 알이라 하더라도 아까운 청년의 덧없는 희생에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만약 내가 나중에 글을 쓰게 되더라도 소설은 쓰기 어려우리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답 : 내 소설이 선생의 사춘기를 슬프게 했다면 미안한 일이오. 그러나 그것은 일차세계대전의 와중에 발표된 글이었고, 글 속의 청년 데미안 또한 전쟁으로 인한 부상과 사망이었으니 양해하시오. 더구나 그는 탁월한 예지로 전쟁의 도래를 예견하면서, 바로 그 희생 뒤에는 보다 향상된 새 질서가 열릴 거라고 친구를 위로하기까지 했잖소. 사실 그때 나는 반전론을 펴다가 매국노의 낙인이 찍히면서 출판사들의 배척까지 받고 있던 시절이었소. 바로 그 ‘데미안‘도 죽 익명으로 출판되다가 9판부터 간신히 실명을 회복한 곡절이었다오.

문 : 선생님의 유일한 비극소설이면서 다른 작품들과 궤를 달리하는 ‘수레바퀴 밑에서’는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인가 합니다. 수도원의 신학교를 일부러 퇴학당하면서 철공소의 수습공으로 들어가는 주인공 한스의 행적은 바로 선생님의 이력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앞서 신학교의 교장과 교육제도에 반발하면서 도망쳤던 소년 시인 헤르만 하일러는 바로 신학교 이후의 헤르만 헤세가 아닐 런지요. 더구나 “그는 나중에 큰 출세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후일담까지 소개하셨더군요.

답 : 별걸 다 들추시오. 모든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발산하듯, 작가 또한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하기 마련이오. 그렇다고 작중 인물이 바로 작가 자신이어야 한다면 가혹한 일이오.

문 : 선택된 수재들만 들어가는 신학교를 2등으로 합격했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를 낙제생으로 내몰고는 체력에도 당찮은 철공소로 들여보낸 뒤, 마시지도 못 하는 술을 먹여 강물에 익사시킨 수레바퀴는 지금 우리네 동방에서도 횡행하면서 착하고 여린 싹들을 종횡으로 뭉개고 있습니다. 손자 놈이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자기를 뺀 반원의 상당수가 고등학교 상급반의 수학과목을 사설학원에서 소위 선행학습으로 공부한다면서 울상입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바로 대학입시에 돌입하는, 그야말로 현대판 수레바퀴의 현장인가 합니다. 이러고도 우리의 앞날이 온전할 런지요?

답 : 손자에의 애착이 각별한 그쪽 할아버지들의 정서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린 싹으로만 보이겠지만, 그래도 고만한 갈등쯤은 너끈히 극복하며 성장할 것입니다. 내가 탈출해서 철공소와 서점을 떠돌게 했던 신학교는 그 정도의 류가 아니었습니다. 한창 성장기의 생도들을 엄격한 기숙사 생활로 가두고는, 기독교의 유일 선(善)과 라틴어만을 주입식으로 암송시키는 교육제도는 그야말로 인성 자체를 말살시키는 형극의 과정이었소. 그러나 그 또한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만한 성장의 아픔이 아니었나 싶군요. 내가 “수레바퀴 밑에서”를 발표한 것은 서른 살도 되기 전의 일이었고, 도망쳐 나왔던 신학교에의 적개심 내지 강박관념이 그때껏 삭혀지지 않고 생생했나 봅니다.

문 : 제가 선생님의 부음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때 지극히 피폐했던 우리네 산골마을에는 동네에 한 대뿐인 라디오가 유일의 전파 문명 기기였고, 당시의 국영 라디오 방송에는 재치문답이라는 코너가 있었지요. 대여섯 문화계 명사들이 그날의 화두로 재치 넘치는 구절을 만들면서 인기가 대단하던 프로였습니다. 바로 그날의 두 글자는 ‘만세’였는데 그때 한창 문단의 새 별로 이름을 떨치던 여류 소설가가 “만인의 애도 속에 가버린 헬만 헤세”라면서 산뜻한 재치를 발휘하더군요. 그로서 선생님이 우리의 곁을 떠나신 것을 처음 알았고, 나 또한 만인의 하나가 되어 선생님을 애도하면서, 여자대학에서 ‘오월의 여왕’을 지냈다는 미모의 여류 소설가를 밤하늘의 별처럼 흠모하기도 했습니다.

답 : 대륙의 동쪽 끝 그곳에서도 나를 사랑하고 애도해 준 손자뻘의 청년과 미모의 여류 소설가가 있었다니 듣기에 나쁘지 않군요. 그런 줄 알았더라면 술을 조금 줄이더라도 좀 더 많은 글을 남기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막급이군요.

문 : 술을 줄이신다는 말씀은 당치도 않습니다. 술이야말로 자연, 인간과 함께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떠받치는 세 개의 솥발(鼎足)이었으니까요. 저 또한 외항해운회사의 영업 부장이었던 젊은 날에 호주(好酒), 호음(豪飮)하던 음주의 이력만은 여태 견지하고 있습니다. ‘향수’의 페터 카멘찐트 부자가 호숫가 고향마을 주점에서 서로 주량을 다투면서 마시던 베르틀린, 발리스니, 바아트란드 술을 언젠가는 꼭 한 번 마셔 보리라는 소망과 함께 말입니다. 이 또한 술과 커피는 양껏 즐기는 것이 좋다는 선생님의 구절 탓인가 합니다.

그때 장안의 내로라하는 주점들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면서 맘에 드는 마담들에겐 선생님의 ‘싯다르타’ 한 권씩을 선사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책 뒤쪽 내지에다

“헤세는
주정뱅이, 오입쟁이, 투전꾼.
예수를 뜸떠먹고 석가모니를 어께 짚는
수다쟁이, 환쟁이.
그리고 또 헤세는
허황한 바람,
바람에 날리는 구름,
떴다하면 스러지는 저녁놀.
알프스 산록 어디쯤에
저 혼자서 슬며시 송이 버는 한란.”

▲ 김문호 사장
이라는 낙서를 잊지 않았고 그 아래로 “헤세가 카마라에게”라는 마감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과의 대면이 황홀하고 작별이 아쉬운 나머지 예의며 두서를 망각하는 서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답 : 이번에는 듣고 있기가 영 떨떠름하군요. 그러나 어찌 하겠소. 이 또한 흘러간 강물인 것을. 그리고 선생, 당부하건데 이쪽 세상에는 가급적 천천히 오시오. 이곳에는 그곳만큼의 술친구가 없소.

답 : 선생님, 사랑과 존경의 큰절을 올립니다. 명복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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