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스타 이석행 대표

칠레 거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10월 11일 산티아고 시내 관광

산페드로(San Pedro)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우리 일행은 남북으로 긴 칠레의 중간쯤에 위치한 산티아고(성 야곱의 스페인어)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다. 공항에 내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산티아고 시내 자유 여행을 하게 돼서 흥분된 마음이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먼저 점심을 사먹기 위해 여행 가이드가 추천한 '중앙시장'이란 곳을 찾아 나섰다. 칠레가 남미국가 중 가장 잘 사는 나라여서 그런지 산티아고 시내는 어느 유럽의 도시 못지않게 형성돼 있으며 물가도 오히려 한국보다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시장이란 곳에 갔더니 시장 규모가 압도적이었고 그 안에 다양한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많았다. 나는 일단 시장 전체를 개관하고 해물탕을 시켜 먹었다. 아주 독특하면서도 맛이 있었고 뜨거운 국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니 여행의 피로가 쫘악 풀리는 기분이었다.

▲ 산티아고 중앙시장

점심을 먹고 산티아고의 유명한 곳을 찾아 구경한 후 호텔로 돌아 왔다. 그러나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아 호텔 직원에게 근처에 산책할 만한 곳을 물었더니 산타루치아 전망대를 추천해 줬다. 산타루치아 전망대까지 오르는 산책길도 좋았지만 전망대에서 산티아고를 내려다보니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 곳에 오르니 이태리 가곡 '산타루치아' 생각이 절로 났다.

▲ 산타루치아 공원 전망대

10월 12일 비냐델마르와 발파라이소

산티아고에서 약 120km 떨어진 휴양도시인 비냐델마르와 발파라이소를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 칠레 와인을 파는 대형 매장에 들러 각종 와인들도 구경하고 시음도 했다. 일행 중 한 분이 와인박사라 흥분하면서 좋아했는데 비전문가인 내 눈에는 그것이 그것이라 브랜드별 종류와 천차만별의 가격표만 보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인구 약 30만명이 사는 비냐델마르(Vina del Mar ; 직역하면 바다의 포도밭)였다. 해변가가 있는 아름다운 곳의 식당에 가서 럭셔리 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식당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 그리고 식당 뒤편 언덕 위의 집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 비냐델마르 해변가 식당에서 바라본 풍경

비냐델마르의 전체적인 모습을 간직한 채 바로 붙어 있는 발파라이소(Valparaiso ; 직역하면 천국을 가다)라는 휴양도시에 도착했다. 발파라이소 마을 여기 저기 그려져 있는 각종 벽화들을 구경했다. 나중에 걷다 지친 일행들이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쉬는데 필자는 여행 가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30분 정도 시간을 달라고 해서 더 깊이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 깊이 들어가 보니 엄청나게 다양한 벽화가 많이 보였다.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필자의 모습에 일행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실제로 더 많은 것을 보았으니 후회는 없었다.

우리가 발파라이소에서 마지막 방문한 곳은 칠레 민중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였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고 한 파블로 네루다가 살던 집과 박물관이었다. 여행 가이드로부터 칠레 공산당원이었던 네루다의 질곡 같은 삶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 기억들을 되살려 보니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만 머리 속에 남아 있을 뿐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발파라이소는 2003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파나마 운하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마젤란 해협의 중간 기착항으로 유명했었는데 파나마 운하 탄생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다시 칠레의 부호들이 찾아 들면서 발전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 발파라이소 거리의 벽화

10월 1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티아고 일정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남미여행에 익숙해져서 인지 비행기 타는 게 버스 타는 정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력이 붙었나…

오후가 돼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는데 호텔 근처에 있는 국회의사당이 바라보이는 공원까지 산책을 했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 반군들이 나라를 세우고 이태리 노동자들을 받아 들여 만든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인구의 90%가 백인들이라고 한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사당

남한의 28배 면적에 인구 4300만 명을 보유한 자원 부국인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발전했지만 극심한 좌파 정치와 포퓰리즘으로 외채에 시달리는 나라로 변모했으니…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산다는 교훈과 포퓰리즘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패론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33세에 요절한 에비타는 65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한 탱고는 부두의 이태리 남자 노무자끼리 이민 온 애환을 달래기 위해 추었던 춤으로 춤과 함께 불렀던 초창기의 탱고 음악은 상당히 슬픈 곡조였는데 지금은 시대의 조류에 맞춰 요즘은 다소 빠른 경쾌한 템포로 바뀌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날 저녁에 관람한 아르헨티나 탱고 공연 중에 여자 가수가 '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스페인어로 부르면서 무대 뒤의 스크린에 에비타의 생전의 모습과 1952년 에비타 사망시 장대비 속에 애도하는 국민들의 행렬이 비춰졌다. 여자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필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아르헨티나 국민들 가슴 속에 에비타가 살아있구나’라고 느꼈다.

탱고가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했다고 해서 꽤 기대를 갖고 보았는데 오래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탱고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탱고는 경쾌하고 빠른 반면 아르헨티나 탱고는 덜 다이나믹하게 보였다. 에비타를 그리는 슬픈 곡조의 탱고 음악의 여운 때문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극장 공연

10월 1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관광

아침 식사 후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비행기 기체의 재료로 만들어져 야간에 불을 밝히면서 피고 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꽃 조형물인 '플로라이스 헤네리까'였다.

그 다음에 시내 한 가운데 위치한 유적지 같은 곳을 찾았는데 집 모양의 묘소가 5천여 개 있는 에비타 레꼴레따(Recoleta) 묘지였다. 비운의 에비타 묘지는 페론 대통령의 가족들로 부터 인정받지 못해 친정집 가족 묘지에 안치되어 있었다. 전혀 묘지 같지 않은 특별한 곳이었다.

▲ 레꼴레따 묘지

다음으로 1912년 오페라 대극장으로 개관했다가 서점으로 바뀐 엘 아떼네오(El Ateneo)에 방문했다. 엘 아떼네오는 스페인 유명 잡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는데 오페라 대극장 전체가 서점으로 바뀌었으니 웅대하고 아름다웠다.

▲ El Alteno 서점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아르헨티나 탱고가 탄생한 라보까라는 항구였다. 그 곳은 정말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각종 토산품 가게들이 즐비했고 거리에서 여자 댄서들이 남성 고객과 탱고의 가장 선정적인 동작으로 포즈를 한번 취해주고 돈을 받는 곳이 눈에 띄었다.

음식점들도 젊은 남녀 댄서들을 고용해 탱고 음악에 맞춰 탱고를 추는 모습을 보여주며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음식점 앞에 펼쳐 놓은 탁자 앞에 앉아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과 춤을 보면서 아르헨티나 와인을 한 잔 하고픈 마음이 간절했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그 곳을 보고 가야하는 상황이라 그러한 여유를 즐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라보까 항구를 마지막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으로 이동해 아르헨티나 남단 땅끝 마을인 우수아이아(Ushuaia)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탱고 발상지 라보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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